경기여중과 경기여고를 다니며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최 교수는 처음 실시된 74년 서울대 계열별 모집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는 “이 좌절이 또 하나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이때 한국외대로 진로를 바꿔 불어과에 지원한 그는 평생 프랑스어와 인연을 맺게 됐다. 대학 4학년 때 불어과 학과장실 조교를 맡아 교직원에 한해 자격이 부여된 프랑스 정부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했고 수석으로 붙었으나 ‘어린’ ‘여성’이란 이유로 대학 교수에게 자리를 내주는 경험도 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파리 제 3대학 통번역 대학원 원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 결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언어의 달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의기양양하게 떠난 유학에서 그는 현지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통역이 아닌 번역학부에 입학했고, 첫 시험은 20점 만점에 2점이란 수모를 겪기도 했다. 꼴지 중에서도 2등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는 ‘확실한 꼴지’였단다. 이때부터 르몽드지 사설을 읽고 분석, 요약해 교수에게 첨삭을 받는 과외가 시작됐다. 딸기밭 교정 노트를 받은 지 12개월,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통역학부에 입학했다.
이 후 더 혹독한 훈련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 13~15시간 공부에 매달리느라 당시 8kg이나 몸무게가 늘어났다. 두 번은 공부하다 ‘쓰러진’ 경험도 했다. 대학원 진급시험을 신청하러 갔다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간 후에도 혈압, 맥박, 심전도 등 의학용어를 프랑스 어로 물어보는 악바리 근성을 보였다고. 그렇게 프랑스에서 3년을 공부한 후 그는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출처] [통역사] 통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작성자 바르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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