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그는 다시 멈춰 섰고 그녀의 냉장고가 놓여 있던 곳, 이제는 텅 비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자리에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며 서 있는 것 같다. 밖에 춥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휜 셔츠를 입은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는 저절로 춥긴 별로야. 혼자 공허하게 대꾸하다가 어깨를 한번 움츠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대답을 소리로 듣지도 못할 거면서 무엇이든 물었다. 텔레비전의 동물의 세계 프로그램에서 밀림의 코끼리들이 천연적으로 알콜이 만들어지는 풀들을 뜯어먹어 술취해 비틀거린다는 얘기에 코끼리들이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그는 거창한 밀림이 자꾸 파헤쳐지고 그나마 살아남은 코끼리들도 자꾸만 터를 뺏기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래. 대답하다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만 보고 진행자의 소리는 듣지도 못하면서 코끼리들이 뭘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인가? 스트레스 때문이래. 라고 대답하는 그이 대답을 이해하긴 하는 것인가? 그의 의아심하고는 상관없이 그녀는 엉뚱한 말까지 더 보탰다. 코끼리들이 스트레스를 받긴 받을 거예요. 이 지구상에선 커다란 것들이 점점 없어 다음엔 자신들이 소멸할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선 그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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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냉장고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안으려나 가는 듯 그가 안으로 성큼 들어섰을 때 세면장에서 뭔가가 화다닥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정말 그녀가? 순간 그의 가슴에 반가움이 흘렀다. 화수?
그는 얼른 세면장 안을 들여다봤다. 그녀는 없고 세면대 위 거울 앞에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가 등을 세우고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렇겠지. 그는 멋쩍게 웃었다. 낮에 건물 뒤에 숨어서 그녀의 이삿짐이 트럭에 실려 떠나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았으면서도, 그랬으면서도 그녀가 아직 여기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다니. 어둠 속에서 사삭, 거리고 있는 고양이 눈이 새파랗다. 그녀가 기르던 두 마리의 고양이 중 점박이다. 점박이는 그녀가 원래부터 기르던 고양이었다. 갈색 털에 흰색 털이 점처럼 박혀 있어 점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녀가 트럭에 올라탔을 때 품에 안고 잇던 고양이는 희디 흰 것이었다. 그 흰 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그가 어느 식당에서 얻어 온 것이었다. 이제는 쟁쟁한 기타 리스트가 되어 있는 친구의 독주회에 갔다가 저녁을 먹으러 들른 식당에 새끼 고양이들이 다섯 마리나 있었다. 태어난 지 3주나 돼 다른 놈들은 활발하게 식당 손님들의 발 밑을 기어다니고 뛰어다니는데 온몸이 하얀 고양이 한 마리만 움직이지를 않고 주눅이 들어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새끼 고양이들을 귀여워하니까 음식 시중을 드느라 왔다갔다하던 주인이 기르고 싶으면 가져가라, 했다. 어여뻐 하면서도 막상 가져가라 하니까 누구도 선뜻 나서지를 않았는데 그이 입이 어느새 내가 한번 길러 볼까요. 말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 중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는 흰 고양이를 안고 왔다. 털이 희다고 그는 그 고양이를 흰순이라 불렀다. 흰순이는 순하고 얌전했다. 하지만 전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였을까, 흰순이는 그저 가만 웅크리고만 있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를 반으로 나눠 마시고 고양이들은 통조림을 좋아 한다길래 슈퍼마켓에서 참치 통조림을 사와 접시에 조금씩 덜어 주었는데, 흰순이는 그가 옆에서 쳐다보고 있으면 그걸 먹지도 않았다. 그가 모른 척하고 있어야 겨우 조금 입에 댔다. 흰순이는 간섭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작은 모래 상자를 만들어 옆에 뒀더니 거기에 오줌도 누고 똥도 누고는 안 그런 척 열심히 덮어놓기까지 했다.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새벽에 눈을 떴는데 흰순이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에 있겠거니 했는데 오전 10시가 돼도 안 보였다. 출입구를 열어 두지 않은 이상 흰순이가 그이 방을 나갈 도리가 없는데 이 구석 저 구석을 다 들여다봐도 기척도 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그때 코미디언처럼 책상 서랍까지 열어 봤다. 그의 방은 7층이었고, 나가면 곧 찻길이었다. 오므리고 앉아 있는 것밖에 사회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던 흰순이가 방을 빠져나갔다면 어리둥절한 채 교통사고를 당했을 게 틀림없었다. 제발 방을 빠져나가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그는 책 사이사이, 악보 사이사이까지 들여다봤는데도 없었다. 정오가 되었을까, 그렇게 찾아도 기척이 없던 흰순이가 어디선가 가르룽,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소리 난 곳을 헤쳐 보니 악보들 사이사이 뒤켠 그이 옛사진들을 담아 놓은 노란 봉투 속이었다. 폭삭한 솜까지 깔아 준 집을 마다하고 흰순이는 그렇게 구석쟁이를 찾아 들어갔고, 그는 매일 구석을 쑤시고 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흰순이는 책상 밑바닥에 달라붙어도 있었고, 싱크대 서랍에 들어가 있기도 했으며 이젠 그가 신지 않는 낡은 신발 속에 웅크리고도 있었다. 한번 구석을 파고들면 그가 찾아낼 때까지 거기 오므리고 앉아 있었다. 그게 저 사는 방법이었는지 몰라도 음식을 먹질 않으니 걱정이 드는 건 그이 성가심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그의 방에서 죽은 고양이를 집어내는 일 같은 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겨우 찾아내서 밥을 먹이곤 하는 일을 얼마간 하다가 그는 흰순이를 그녀에게 안고 갔다. 그녀가 흰순이의 터였을까? 흰순이는 그녀의 손안에서 금방 투실해서 어린 티를 벗었다. 처음에 흰순이 등장에 성을 돋우던 점박이는 나중엔 제 집을 흰순이에게 내주고 저가 냉장고 위나 신발장 위, 아니면 흰순이가 자고 있는 집 옆의 방바닥에서 잤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거울 속으로 비친 점박이의 등이 실제의 등과 겹쳐 점박이는 아주 커다랗게 보였다. 그가 세면장으로 들어가서 웅크리고 있는 점박이의 두 눈을 가리며 안아 내려니 점박이는 갑자기 베란다 쪽으로 화다닥, 튀어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점박이의 뒤를 따랐다. 한 마린지 두마린지 생쥐가 찌익- 소리를 내며 어디론 가로 사라졌다. 점박이는 아쉽다는 듯 생쥐가 사라진 쪽을 파란 광채의 눈으로 쏘아보고 있다. 아직도 쥐덫이 있군. 그는 점박이 뒤에 서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베란다 끝에 아직 쥐덫이 놓여져 있는 걸 쳐다봤다. 어느 날 그가 그녀에게 쥐가 있나 보다고, 아주 가까운 데서 생쥐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그녀는 설마 쥐가 있을라구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은 쥐덫을 사다 베란다에 설치한 뒤 노트에 썼다. 정말이었어요. 새벽에 세면장에서 생쥐가 비누를 갉아먹고 있는 걸 봤어요. 그는 새벽에 그녀의 세면장에서 비누를 갉아먹고 있는 생쥐의 모습이 어땠을까?를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그는 쥐의 소리만 듣고 그녀는 쥐의 모습만 봤을 뿐이었다. 소리는 모습보다 질기다. 어느 날 새벽에 비누를 갉아먹느라 그녀에게 모습을 들킨 생쥐는 더 이상 음식이나 비누를 갉아먹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랬다. 생쥐는 그녀가 귀머거리인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쥐덫을 피해 구석구석 어딘 가로 생쥐는 찌익- 소리로만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모습이 안 보이니 그녀는 곧 생쥐도 쥐덫도 잊었다. 모습만 나타내지 않으면 생쥐는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완벽히 숨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이 귓속에서 생쥐는 찌익 - 소리가 존재했다. 그녀가 못 보는 생쥐의 존재를 그 자신 혼자서 소리로 느끼며 그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언젠가 한 여자가 느닷없이 그를 떠난다고 했을 때, 당신의 기타 소리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정중하게 말하고서 가 버렸을 때, 그가 그저 담배나 피우고, 얼마간 걸어다니다가 돌아와 기타를 치던 손톱을 깎고, 두 계절인가를 창 가까이에 앉아서 천정을 지나가는 거미나 바닥을 기어가는 바퀴벌레 같은 걸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빈방에 앉아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라는 여자의 말을 웅얼거릴 때마다 마음에 스며들던 그것과. 이제 더 앉아 있지 말자, 무슨 일인가 하자, 마음먹으며 다시 기타를 메고 학원에 나갔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기타 소리가 더 좋아졌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는 생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가르릉- 거리는 고양이를 향해 엎드렸다. 그이 손이 닿자 점박이는 이미 세운 등 더 세우고는 파다닥 튀어 나갔다. 점박이는 방바닥을 딛고, 창틀을 딛고, 그녀가 떼어 가지 않은 선반 위에 사뿐히 올라가 앉았다. 그곳에서 얇은 책 한 권이 툭 떨어졌다. 다가가서 집어 보니 몇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얇은 팩 속에 편지 봉투가 끼워져 있다. 그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또 시작이군. 봉투 속의 편지를 꺼내려는데 그의 귓속으로 망치 소리가 신경을 끊듯 섞여 들었다. 도대체 저들은 벽에 무엇을 저토록 박는 걸까? 그녀와 함께 있을 때도 위층에서는 자주 벽을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곤 저들은 한번 망치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적어도 두 시간은 소리를 냈다. 두 시간 동안 내내 두들기는 건 아니었지만 십분 간격에 오 분 간격에 이십여 분 간격에 어김없이 쾅쾅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다가, 다음에는 그 벽이 아니라 아래층 이 벽이 허물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다가, 그도 저도 지나가면 그댄 그 층의 벽이 망치에 얻어맞는 게 아니라, 그이 머리를 망치가 내려치는 것 같아졌다. 그 소리에 그는 괴로워 죽을 것 같은데 그녀의 검은 눈은 산 속처럼 고요했다. 그는 기가 막혀 노트를 꺼내 썼다. 저 소리가 안 들린단 말이야? 그러구선 내 기타 소리를 듣고는 어떻게 그토록 박수를 쳤지? 그녀가 받아썼다. 당신 손가락이 기타 위에서 소리를 냈어요. 나의 손가락이? 겉봉에는 어떤 글씨도 없다.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의 글자 위로 위층의 쾅쾅거리는 망치 소리, 어딘 가로 도망치는 생쥐의 찌익찌익 소리, 스튜디오 뜰의 거위가 화다닥 거리며 꽉- 하는 소리가 끼여들었다.
이 글을 그쪽이 읽게 될는지요.
한번은 그쪽이 이 빈집에 올 것이기에 나도 한번은 내 마음이 그쪽에게 읽힐 기회를 만들어 봅니다. 그쪽이 선반 위에 놓여질 이 편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만이고 만약 발견한다면 내가 그쪽 몰래 이 집을 비우고 가는 것이 언젠가 한번 그쪽을 떠난 여자 때문이 결코 아님을 알아주세요.
그는 머리가 띵해 잠시 읽는 것을 멈췄다. 위층의 망치 소리가 천정을 흔들고 그가 기댄 벽을 흔들었다. 그 진동에 점박이가 놀라 그이 배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는 지진 같은 진동을 이루는 망치 소리가 마치 자신의 손등을 내리치고 지나간 것 같은 타격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떠나간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가? 그는 다시 편지에 눈길을 돌렸다.
두통 때문이에요.
두통?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두통 때문이라고? 그녀는 단 한번도 그에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쪽에서 기타 줄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그쪽 손가락을 보고 있으면 내 귀는 그 손가락들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지만 나는 그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쪽 손가락이 가장 자리에서 새어나오는 진짜 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이 싹텄어요. 그 소리 속에 사랑하고 욕망하고 후회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을 것만 같았어요. 나는 그날부터 두통에 시달렸어요. 그쪽의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를 한번만 한번만 내 귀로 듣고 싶어한 그 순간부터요. 어제는 한줌 먹은 알약을 토해 냈어요. 의사는 내가 마음속으로부터 아무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된다고 했어요. 그의 진단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지요. 하지만 나날이 너무나 괴로워서 슬퍼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어요. 머리를 한쪽으로 매어 두고 두 손으로 꼭 껴안고 있어도 두통은 거기까지 따라와서 나를 한밤중에 침대에서 떨어뜨리곤 했어요. 머리 한 군데가 피투성이로 늘어진 것같이 아팠어요. 때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쪽도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울거나 웃으면 두통은 입 모양이 만들어지는 쪽으로 왈칵 쏠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답니다. 한번만 당신이 내는 소리를 듣고 싶어한 대가가 너무 슬퍼요. 너무 아파서 이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 찬물에 머리를 넣고 나와 머플러로 침대와 내 머리를 묶어 두고 배 위에 양손을 포개고서 한번만 그쪽 손가락이 내는 소리를 듣고자 했던 원을 놓았어요. 그러니 머리가 편안해졌습니다. 안녕, 내 사랑. 차라리 이 빈집에 들어와 이 편지를 읽지 말길. 내가 집 정리를 하는 줄 알면서도 그쪽의 또 다른 마음이 모른 척하였듯 차라리 내가 두통 때문에 그쪽을 버리고 가는 걸 영원히 모르길. 그러면 뒷날 그쪽 마음에 내가 가엾을는지.
아아아, 그는 소리를 지르며 편지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이 비명은 쾅쾅거리는 망치 소리를 이기지 못했다. 무엇에 놀랐는지 뜰의 거위들 꽉 외마디를 지르며 파드득거렸다. 망치의 쾅소리와 거위의 꽉 소리 사이로 어디선가 찌익하며 생쥐가 지나갔다.
철커덕 철커덕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 자동차 끼익 급정거하는 소리, 후다닥 계단을 뛰어가는 소리, 오래된 아파트 무너뜨리는 소리, 셔터 내리는 소리 속에 끼어 있을 때마다 그는 생각했었다. 저 소리 소리들이 결국 살아가고 싶은 욕망을 균열 지게 할 거 라고. 봄이 되도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진 육교를 지나거나, 강습 시간은 늦었는데 트럭과 소형차들 속에 끼어 움직이지 않는 버스 기타를 메고 거리를 내다보면서도. 그런데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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