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신경숙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눈물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꼭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모― 기형도, [빈집] 전문>
스페인은 언제 가시우?
밤이 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을 흠뻑 맞아 눈사람이 되어 스튜디오 경비실을 막 지나려는 그를 보며, 아니 그의 어깨에 걸린 기타를 보며, 늙은 경비원이 습관처럼 물었다. 봄이 오면....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을 줄여 버리려는 참인데 스튜디오 뜰의 거위 우리의 꽉꽉 소리가 그의 소리를 잘라먹었다. 웬 뜰의 거위를?
그가 늙은 경비원이 거위를 기르고 있었던 걸 모르고 꽉꽉 거리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물었을 때 경비원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엄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었다. 집 지키는 덴 거위가 최고요. 나는 이때껏 거위만큼 집 잘 지키는 사나운 놈은 못 봤소. 나 어려서두 산골짝에 있는 내 집도 거위 두 마리만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서웠으니까. 그러니 상관 마오. 댁은 여기 사는 사람도 아니잖우. 후에 알고 보니 늙은 경비원의 그런 신경질적인 반응은 그에게만 보이는 반응이 아니었다. 도저히 주거용 건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내의 한복판에 이 스튜디오는 뭔가 비현실적으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평수는 가장 넓은 게 14평이고 가장 많은 게 10평짜리의 원룸 형식의 방들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살림을 하는 이들은 없고, 시내에 직장을 둔 혼자 사는 사람들이나, 혹은 굽이진 사연을 안은 채 둘이 사는 사람들, 간혹 신혼부부들도 있는 것 같았으나, 그는 지난 일년을 그녀의 집에 드나들면서 여기에서 어린아이가 달린 가족들을 본 적은 없었다.
스튜디오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 주인은 따로 있고 모두들 보증금 얼마에 다달이 집세를 치르며 살고 있었다. 건물 주인의 먼 친척이라는 경비원은 여기에 채용이 되자마자 스튜디오 뜰에 거 위 우리를 만들었고, 스튜디오보다 거위 보살피는 일에 더 시간을 보냈다. 늘 게으르게 눈이 내려뜨려져 있는 늙은 경비원의 눈이 부라려지는 순간은, 바로 사람들이 거위에 대해 불만을 드러낼 때였다. 한밤중 혹은 새벽 아무때나 거위들은 꽉꽉거렸고, 그 소리에 잠깬 피곤하고 창백한 얼굴들이 창에 얼굴을 내밀고 거위 욕을 하면 경비원은 대번 그 창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집 지키는 데는 거위가 최고라니께.
갑자기 웬 눈인지 모르겠구먼요. 눈을 보니 조놈들도 발 시렵고 깜짝 놀라겠는가 봐요. 눈 내리게 시작할 때부텀 저리 꽉꽉거리느만요. 아, 내 정신 좀 봐 스페인은 언제? 봄이 오면, 이라고 다시 대답했던가? 겨울이 오면, 이라고 했지 겨울이 오면 가야지요. 소양 교육도 받아 놨으니.
스페인. 그는 웃고 있는 자신의 입꼬리를 갈무렸다. 겨울에는 스페인의 봄, 갈리시아의 이끼 낀 교회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며 봄이 오면, 이라고 말했고, 막상 봄이 오면 스페인의 여름, 나자레 해변을 씻어 내리는 대서양의 물결을 생각하며 여름이 오면, 이라고 했다. 그렇게 또 여름이 오면 스페인의 가을, 한낮의 공원에서 푸른 거울 같은 하늘을 보며 빠져 들은 그들의 낮잠을 생각하며 가을이 오면, 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시에 스타라 불리는, 낮잠 자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를 두 번 산다, 했다. 겨울에는 겨울에는? 지금은 겨울인데 스페인의 겨울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계절을 넘어, 변해 가는 것과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의 공전을 넘어, 피레네 산맥이 있을 거였다.
지금은 겨울이다. 그래 겨울이지. 특히나 오늘은 갑자기 기온이 영하 7도로 떨어져서 그는 학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깨에 질머진 기타를 한번도 손으로 잡지 않았다. 눈바람 속에 칼날 이 느껴져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내기만 하면 그대로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듯했다. 그래, 겨울이다. 무방비 상태로 내놓아진 얼굴, 살갗 밑에 살얼음이 쌓인 듯 시려운 겨울. 어깨에, 머리에, 기타에 쌓인 눈을 툭툭 털며, 신발 위에 쌓인 눈도 털기 위해 발을 툭툭거리며, 계단으로 오르려는 그를 이보우, 하며 경비원이 다시 불러 세웠다. 돌아다보니 경비실 창으로 경비원의 늙고 핼쑥한 얼굴만 나와 있다. 깜박했는데 그 꽃 만드는 처녀 이사갔수? 아우? 그는 대답 대신 낮에 그녀가 이삿짐이 실린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았던 스튜디오 입구의 건물에 시선을 주었다.
하긴 말두 안하고 이사했을 리는 없고. 그럼 이 밤중에 뭐하러 빈집으로 올라가우? 뭘 놓고 갔다허우? 열쇠는 있소? 그래, 그녀가 떠난 줄을 알면서 나는 왜 저 빈집에 들어가려 하는가?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온 걸음도 아니다. 학원 야간반 수업을 진행중일 때, 수업을 마치고 미끄러운 학원 현관을 나설 점점 굵어지는 거리의 눈발 속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는 분명 그녀가 갔음을 느꼈다. 그는 거리에서 스스로를 향해 속삭이기까지 했다. 낮에 몰래 숨어 그녀를 실은 트럭이 그녀를 태우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걸 보지 않았더냐, 한달 전부터 그녀가 그녀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으면서 마치 그녀가 떠나기를 기다리고나 있었
던 듯, 모른 척하다 맞이한 오늘이 아니었더냐, 고. 모른 척한 이유는 있었다. 나는 스페인에 가야 하니까, 언젠가는 그녀를 떠나야 하니까, 그녀가 가려할 때 보내야지, 그때 상처가 안 되게. 그녀는 갔다. 자주 그녀를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그녀를 붙잡지 않게 했다. 그녀가 간 줄, 이제 그녀의 집은 빈집인 줄 알면서도, 그는 여기로 오고 있었다, 한사코.
그는 현관문에 열쇠를 꽂다 말고 가만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이사한 방안은 분명 텅 비어 있을 텐데 방금전 열쇠를 문에 꽂자 안에서 무엇이 놀라 후다닥거렸다. 혹시 그녀가 돌아왔나?
부질없이 귀를 기울이니 문안의 기척은 사라지고 조용했다. 그녀가 있을 리가? 그래 있을 리가. 그가 다시 열쇠를 만지려는 적막 사이로 갑자기 옆집에서 켜는 텔레비전 뉴스 소리가 쨍하니 섞여 들었다. 오늘 오후 1시쯤 동대문구 이문 2동 307번지 김선식 씨 집에 세들어 살던 아파트 , 청소원 부부가 나란히 숨져 있는 것을 셋째 딸인 미영 씨가 발견했습니다. 미영 씨는 회사 기숙사에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에 와 현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문이 안으로 잠겨 있고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자살로 추정하고 있으나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대로 망연히 서 있었다. 바람이 뼛속까지 휙 들어오는 것 같아 그는 다시 손을 열쇠에 갖다 대기 전에 손바닥을 비볐다. 어느 날 그녀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빼 그의 왼손 가락에 끼워 준 반지가 오른손 등이며 손바닥에 스쳐졌다. 그는 문을 따로 안으로 들어와 문에 등을 대고 가만 서 있었다. 처음엔 깜깜했던 방안의 어둠이 차츰 익숙해지자, 흰 벽이 보이고 세면장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떼어 가지 않은 선반이 구석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까지 눈에 잡혔을 때, 그는 기타를 풀어 문에 세워 두었다. 봄은 희망이야. 봄이 되면 스페인에 갈 거니까. 거기 가서 빠꼬 데 루시아처럼 악보 없이 플라멩고를 칠 거니까. 그래 그럴 거니까.
그녀를 만난 날도 봄이었다. 모두들 자칭 기타 리스트들인 아는 얼굴들이 모여 객석 의자가 마흔 개도 될까말까한 소극장에서 연주회를 열었을 때, 그 자리에 그녀가 왔었다. 그가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과 마이어즈의 카바티나를 접속곡으로 연주하고 났을 때 그녀는 박수를 쳤다. 그가 사티의 짐노페디를 켜고 마지막으로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치고 났을 때도 그녀는 앉은 채로 계속 박수를 쳤다. 쉬지 않고 박수를 치고 또 쳤다. 그녀가 얼마나 많이 박수를 쳤는디 누구나 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손바닥이 얼마나 아플까를. 그래서 연주회가 끝났을 때 그가 극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그녀 곁으로 가서 물었다. 기타 소리를 좋아하는가 보군요. 그녀는 대답이 없고 그녀와 동행한 그녀 곁의 늙은 여자가 가만 웃었다. 그는 둘이 모녀 사이인 줄 알고 이번엔 늙은 여자를 향해 따님이 기타 소리를 좋아하나 봐요, 라고 다시 물었다. 그녀의 엄마가 아니고 이모라는 늙은 여자가 대신 대답했었다. 이 앤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귀머거린 걸요. 귀머거리? 그는 멍하니 선 채로 그녀와 그녀의 이모라는 늙은 여자가 극장을 빠져나가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걸 바라보았다. 그이 시야에서 두 여자가 아주 안 보이게 되었을 때 그 는 뛰어나가 그녀들을 찾았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는 그녀들을 찾아냈을 때의 그 반가움은, 오래 전 한 여자의 정중한 이별 후 처음 느껴 봤던 것이었다. 육 년만인지, 칠 년만인지, 그 동안 그 육 년인지, 칠 년 동안, 여섯 번인지 일곱 번인지 봄을 보내면서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그는 스페인에 가기라, 했다. 자그만치 저 옛날, 1600년대에 지은, 길이 94미터에 폭이 128 미터의 사방이 둘러싸인 풍취 잇는 마요르 광장에서, 화려한 왕가의 의식과 사나운 투우 축제와 종교 재판의 화형식이 있었던 그 마요르 광장에서, 유랑인들 틈에 섞여 기타를 치리라, 했다. 아,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아란훼스로 가는 열차를 타리라, 황야 속에서 저 혼자 기름진 들판을 이루고 있는 아란훼스, 수많은 나무와 식물로 둘러싸여 있는 아란훼스, 그 왕가의 휴양소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기타를 치리라, 했었다. 그것만이 그에게 여섯 번인가 일곱 번 봄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는 대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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